1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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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만성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극단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위험한 수준은 아니다. 나는 5년 넘게 우울감을 가지고 살았고 올해가 되기 전까지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고1 이후로는 진지하게는 한 적이 없는 거 같다. 중학생 때까지는 병원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등학생이 되고서는 이 정도 우울감은 누구나 가지고 있겠지 하고 넘겼던 거 같다. 물론 중3 고1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고 다신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기지만 어쨌거나 고1때도 나는 내가 우울증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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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제대로 한 건 올해에 들어서였다. 그것도 여름 방학이 지나고서야 나는 병원을 찾을 생각을 했다. 여름 방학 혼자 독서실 책상에 아홉 시간 열 시간 앉아서 똑같은 벽만 보고 친구도 못 만나고 갇혀 사는 기분으로 지냈더니 사람이 공황 발작이 왔다. 엘리베이터에 타기 전부터 갑갑하게 막혀오던 숨과 새까맣게 변하던 시야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결국 아파트 1층에서 주저앉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도 못한 채 119를 불러야할지 독서실에 있을 친구를 불러야할지 생각하며 벽에 머리를 박고 있어야 했다. 그러고도 그 상태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탈 용기가 나지 않아 나는 독서실로 갔다.
그 뒤론 일상이 더 힘들어졌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내가 많이 몰려 있다는 걸 공황 발작 덕에 깨달았지만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고 매일매일 드는 우울한 생각들과 자꾸 겹쳐지는 우울한 상황들에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개학하고서는 수업을 듣다가도 숨이 턱턱 막혔고 심한 날은 이유도 없이 자꾸 눈물이 났다. 물론 우울한 상황이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슬퍼할 상황도 아니었는데 친구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자꾸 몸이 축축 늘어지고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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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힘들 때 나는 책을 샀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라는 책이었는데 처음 그 책을 읽으면서는 희망이 생긴 기분이었다. 내가 이렇게 우울하고 생각이 많은 건 내가 나약하거나 지나치게 예민한 성격이라서가 아니라 내 뇌 때문이구나. 선천적인 거구나. 그런 식으로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고선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정신 과잉 활동이라는 명칭은 검색해봐도 논문도 찾을 수 없었고 이 책에서만 다루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더군다나 검색을 하다가 이 책의 내용과 저자를 깎아내리는 글을 본 후 잠시나마 이 책에 의존에 가까운 의지를 했던 나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우울해졌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렇게까지 우울했나 싶지만, 그 순간은 정말 그 글을 보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에 울면서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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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는 결국 병원에 갈 결심을 했고 예약을 했다. 학교까지 조퇴하고 처음 간 정신과에서 나는 처음 보는 남자 선생님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더듬거렸다. 어떻게 오게 됐냐는 말에 생각이 너무 많아요 라고 말하다가 괜히 좀 부끄러워졌는데 어떤 생각이 나냐는 말에서부터는 계속 울면서 이야기해야 했다. 이제는 멀어진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어린 시절은 큰 상처로 남은 모양이었다. 동생이 자폐 판정을 받았던 이야기를 하자 선생님은 바로 '아'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셨다. 어찌보면 참 별 거 아닌 이야기였다. 부모님의 관심이 온통 동생에게 쏠려 있고 자폐증이 뭔지 몰랐던 나는 언제쯤 동생이 멀쩡해질까 언제쯤 다른 애들처럼 평범한 자매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한 살 한 살 나이 먹기를 기다리고. 부모님이 그렇다고 내게 애정을 부족하게 주신 것도 아니고 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부족하게 자란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없던 파란 거실이나 혼자 집을 지키던 저녁들은 내게 트라우마에 가까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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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내 상태가 안 좋다는 건 인성 검사 결과를 보고서야 알았다. 크게 우울한 상태가 아니었고 나는 나름 정상적으로 체크했다고 생각했는데 우울감이나 히스테리 내향성 건강염려 등등 생각보다 높아서 그래프를 보고선 나도 깜짝 놀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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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 날부터 나는 열심히 치료 중이다. 사실 열심히라고 말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잘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앞으로도 평생 나는 우울감을 마음 한 켠에 가지고 살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지금도 내 주위엔 좋은 사람들이 많고 나는 넘어져도 금방 다시 일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