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06
1
어젠 진짜 왜 그렇게 힘들었지? 잠들 때까지도 우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근데 그걸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도 너무 싫었다. 왜 우울한지 왜 이유 없이 우울한지 한참 생각하다 보니까 갑자기 생각난게 나는 원래도 이유 없이 우울했었다. 근데 몇 달 좀 행복하게 지냈다고 잠시 그걸 잊었던 거 같다. 친구한테 편지를 쓰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우울감이란건 아무리 겪어본 적 있는 거라도 한 번 멀어지고 나면 정말 멀게만 느껴지는구나. 아무튼 우울해하면서 잠들었다.
2
일어나고 보니 날씨가 너무 좋아서 왜 어젠 그렇게 우울했지 싶었다. 잠깐 정신 못차리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바로 옷입고 나왔다. 걸어오는데 땀이 안난 건 처음이라 신기했다. 요즘은 학교에 일찍 가는데 그동안은 맨날 교실 가서 일찍 온 애들이랑 떠들고 놀았는데 어제는 처음으로 면학실 가서 공부부터 했다. 사십 분이면 매삼비 하나랑 마더텅 20분 모의고사 풀고서도 잠깐 멍때릴 시간이 남아서 가만히 앉아있으면 되는게 너무 좋았다. 오늘도 그러고 공부하고서 교실 가려고 올라오는데 기벡 선생님이랑 같이 오게 됐다. 선생님이 나를 걱정해주시는데 좀 놀랐고 솔직히 말해서 감동받았다.
3
시험 끝나고 추워서 덜덜 떨면서 교실 갔는데 교실은 애들이 많아서 그런지 따뜻했다. 애들이랑 밥 먹으러 맘스터치 갔는데 어쩌다 보니 어제 너무 우울했단 얘기까지 했다. 아마 정말 친하다고 생각한 둘한테는 못했을 거 같은데 아무튼 어쩌다보니 말했다. 그랬더니 YJ가 '그건 다 걔 때문이야'라고 너무 큰 소리로 말해서 나는 막 웃고 HJ는 야! 하고 웃으면서 당황스러워했다. HJ는 나랑 걔랑 왜 그렇게 됐는지 정확하게는 몰라서 그냥 오늘 다 얘기해줬는데 듣더니 너무 놀라했다. 사실 그동안 나는 내가 짐이 되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했는데 오늘 얘기를 나누고 나니까 그래도 조금 안심했다. 그래 이건 내 문제가 아니야 이건 걔가 잘못한 거였고 나는 다른 애들이랑 잘 지낼 거야 하고.
4
오늘 미술 치료 들어가서 지난 주는 어떻게 지냈냐기에 솔직히 말해서 우울했다고 말했다. 너무 오랜만에 죽고 싶단 생각이 들었고 스스로도 놀랐다고 그런 얘기를 하고 나서 천사점토로 그냥 생각나는 걸 만들었다. 오랜만에 만지니까 웃기기도 했고 낯설기는 한데 나쁘진 않았다. 처음 생각난 건 미술실이었다. 초등학교 때 미술실에서 천사점토를 만진 적이 있어서 그랬던 거 같다. 초등학교 때 기억을 계속 생각하다 보니 어째 기억은 다 운동장 쪽에 있었다. 연날리기나 철봉이나 진짜 몇 년간 떠올린 적조차 없는 학교 시계까지 전부 운동장이었다. 점토로 지금 내 모습 과거의 내 모습까지 만든 다음에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걸 아이클레이로 만들고 선생님이 작고 동그란 모양으로 점토를 뭉치셨다. 사람은 처음엔 누구나 이렇게 태어나고 살아가면서 바뀐다고. 너는 어릴 때 참은 게 지금은 많이 둥글어진 네 모양 안에 다 들어있다고 우울한게 당연하다고 하셨다. 근데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서 우울해하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제는 네가 그 아이를 위로해줘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걸 적는 수집 노트를 만들라고 하셨다. 지난 주에도 좋았지만 이번 주도 좋았던 거 같다.
5
심리 검사 결과가 나왔다는데 시간이 짧아서 얘기를 거의 못 들었다. 그냥 머리가 좋다고만 하셨다. 100명 중에 10명 안에 드는 머린데 확실히 지금 집중력이나 그런게 떨어져있다고. 엄마한테 물어보니까 지능 검사에서 내 우울증 때문에 제대로 된 결과가 안 나온 거라고 얘는 지금 자신의 100퍼센트를 쓰지 못하고 있다고 하셨다고 한다. 병원에 좀 더 일찍 가고 일찍 치료 받고 약을 먹었으면 지금 내 성적이 좀 달라졌을까? 대학이 달라졌을까?
6
고양이 만났다. 학교 다시 가려다가 고양이 한 마리가 혼자 울고 있길래 쪼그리고 앉아서 손 내밀었더니 고양이가 바로 와서 너무 깜짝 놀랐다. 그 뒤로도 고양이가 계속 울고 쫓아오려고 해서 어디 못 가고 거의 삼십분은 그러고 있었던 거 같다. 근처 마트에서 급하게 통조림도 사 먹였는데 확실히 배고팠는지 금방 다 먹고 계속 빈 캔을 핥았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다들 '나비야~나비야~'하고 부르고 가는데 그 때마다 애가 야옹야옹 대답하는게 귀여운데 안쓰러웠다. 길고양이인데도 참 순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거 같았다.
귀여웠던 나비
7
따뜻한 파란색이란 말이 갑자기 좋아졌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원래도 좋아했는데 이번에 친구랑 영화 얘기를 하다보니 또 생각나서 다시 한 번 더 보고싶어졌다. 아무튼간에 나는 지금 우울한 상태고 우울증 치료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진 모든게 어렵다. 블로그를 시작한 것도 혼자 이렇게 주절주절 글 쓸 수 있는 곳이 필요해서다. 보통 우울함을 파란색에 많이들 비교하던데 그렇다면 나는 따뜻한 파란색이 되고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우울하지만 지난 십여 년을 견뎌온 것처럼 앞으로도 견딜 것이고 내 주위에 있는 행복을 계속 찾을 거다. 내 부정적인 감정보단 긍정적인 감정에 더 집중할 거고 하루가 힘들어도 그 다음 하루를 기대하며 살 거다. 따뜻한 파란색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