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의 편지
안녕.
빅토리아의 여름은 눈부셔요. 한국의 여름은 정말 지긋지긋했는데, 이 곳에선 처음으로 여름이 조금은 좋아졌어요. 좀처럼 타지에 적응이 힘든 내가 이 시골을 좋아하는 이유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에요.
혹시 알았나요. 내게 정신병이 있다는 걸.
당신에겐 한 번도 말한 적도 내색한 적도 없었지만 나는 우울증 환자였어요. 어쩌면 지금도요. 아마 평생요. 맥주 한 캔을 마시지 않고서는 좀처럼 기분이 들뜨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런 나조차도 들뜨는 날들이 있었죠. 가을 날들. 날씨가 시원해지고 하늘이 새파래지면, 구름 한 점 없는 그 하늘을 보며 나는 기분이 좋아지곤 했어요. 알고 있나요?
그래서 나는 여기가 좋아요. 그렇게도 오기 싫어했던 곳인데, 한국이 너무 그립지만 돌아가더라도 이 곳의 날씨만은 오래오래 그리울 거 같아요.
어학원을 다니고 있어요. 한국에선 다들 내가 어학원에 가면 남자를 만나게 될 거라고 했는데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남자든 여자든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좋은 사람은 많았고 호감이 가는 사람도 내게 잘해준 사람들도 많았죠. 하지만 그들에게 연애감정을 느끼지는 못했어요. 생각해보면 그래요.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데 굉장히 까다로운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당신에게 그렇게 쉽게 빠진 날이 나는 너무 이상하게 느껴져요. 당신에게 품었던 오기가 어느 순간 애정으로 바뀌어버린 게, 너무 이상해요.
머리가 많이 길어서 요즘은 머리를 땋기도 해요. 한국에 있을 땐 상상조차 못한 일들을 여기서 많이 하고 있어요. 외국인들 틈에 있으면 그래요. 내가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말하는 이 사람들이 엑스트라로 느껴지고, 나만 이 곳에서 생각을 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밝은 갈색으로 염색을 하고 머리를 땋고, 선글라스를 끼기도 하고 엄마가 주는 밀짚모자를 쓰기도 해요.
예뻐졌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그리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니 사실은 종종, 아니 사실은 아주 가끔, 나는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도 날 보고 그렇게 말해줬을까요.
한국 친구들과 연락을 많이 하면서도 당신에겐 좀처럼 먼저 연락을 하지 못했어요. 생각해보면 한국에 있을 때도 그랬죠. 나는 늘 당신의 연락을 받는 쪽이었어요. 당신과의 전화 통화는 발화의 비율이 8대 2쯤 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통화가 좋았어요. 술에 취해 들뜬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좋았어요. 내가 누군가에게 큰 비중은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그늘 같은 존재가 될 수는 있구나.
그늘이란 말이, 사실 좀 슬프죠. 그저 쉬어가는 곳. 해가 움직이면 위치가 바뀌어버리는 곳. 그래서 당신도 그렇게 가끔만 내게 왔죠. 나는 그 가끔조차 너무 좋았어요. 때로는 당신이 나를 찾는다는 게, 내가 당신에게 필요한 존재라는게, 당신이 나에게서 위안을 얻는다는게 좋았어요.
난 결코 누군가에게 1순위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에요. 가끔 욕심이 비집고 나오기도 해요. 왜 나를 내가 원하는 만큼 좋아해주지 않나요.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아요. 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늘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근데 작년엔 그게 좀 많이 슬펐던 거 같아요.
내 스물은 아팠어요.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나는 반년을 슬픈 상태로 살았어요. 내 꿈에서조차 다정하질 않더라고요.
빅토리아의 해는 아프지 않아요.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따뜻함을 느끼며 지내고 있어요. 밝은 갈색으로 염색을 하고 머리를 땋고, 선글라스를 끼기도 하고 엄마가 주는 밀짚모자를 쓰기도 하면서.
그렇게도 못하던 요리를 하고 매일 같이 산책을 하기도 하고. 늘 가는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가끔 고개를 들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며 빅토리아의 태양에 겨워하면서. 나는 그렇게, 잘 지내고 있어요. 햇빛 속에서 병이 나아가는 걸 느끼며 너무도 잘 지내고 있어요.
잘 지내나요. 당신의 그늘은 이제 해가 뺏어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