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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가을이다. 기모 맨투맨에 기모 후드집업을 입고 다녀도 선선하고 가을 하늘은 공활하다. 어제 수업이 일찍 끝나고 친구랑 경복궁역에서 여유롭게 밥 먹고 걷는데 기분이 좋았다. 원래였으면 끔찍하게 싫었을 텐데, 햇볕이 따가워도 바람이 차서 힘들지 않았다. 광화문 광장 따라서 쭉 걸어 종각까지 가는데 하늘이 파래서 모든 건물이 예뻐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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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인상을 재밌어 보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나랑 처음 말을 했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고 친구 한 명이 어제 문득 말했다. 새삼 내가 작년 그렇게 걱정했던 게 뭔지 생각났다. 내 밑바닥을 보고 떠날 사람들. 우울해하고 기운 없어 보이는 모습에 질려서 떠날 사람이 너무 무서웠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조금 변명했다. 피곤해서 그래, 피곤해서. 누군가는 내게 그런 모습이 인간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걸 장점으로 봐주진 않을 거란 걸 안다. 오히려 안 좋게 보면 안 좋게 봤지. 늘 빠지는 굴레인데 오늘도 빠졌다. 그러다가 카카오톡 프로필들을 보는데 친구 한 명 배경 사진이 글귀였다.
불안을 공유함으로써 마음과 마음이 서로를 감싸 안는다. 그래야만 상대의 우물을 들여다볼 수 있고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불안의 감각을 기억할 수 있다. 자신의 결핍과 오류를 상대에게 드러내기로 허용하는 것은 내면의 포옹을 청하는 일이다. 자신의 불완전성이 포옹되기를 갈구할 때, 우리는 고독에게 맞설 수 있다.
이것은 친밀감과는 전혀 다른 층위에 속하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사랑의 범주 안에서 가장 정확하게 다루어질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바닥을 매만질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깊게, 더 깊게 자아의 우물을 파낸다. 그 안에 불안이 차오른다. 들여다 본다. 들여다 보게 한다. 그 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서로의 불완전성이 긴밀하게 공유될 때, 우리는 끝 모르고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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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제 전화가 왔다. 다시 잘 풀었다곤 하지만 역시 한 번 깨진 건 되돌릴 수 없듯이, 우리 사이엔 금이 남아있다. 나는 평소처럼 먼저 오지 않는 연락에 겁 먹었었다. 그랬기에 어제 자냐고 온 문자를 보고 불안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전화는 잔잔했다. 사실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술기운 없인 눈물이 나질 않았다. 네가 나한테 완전히 마음 돌린 줄 알았어. 나도 같은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자꾸만 웃었다. 너랑 이제 연락 못할 줄 알았어. 그 말을 들으면서는 미안했다. 버스에서 울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미안했다. 나도 똑같이 울었는데. 내 우울함을 모두 본 친구여서 더더욱 잃고싶지 않다. 너만큼 모든 얘길 할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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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 다 지나가는데 나는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많은 신경을 A에게 쏟은 채로 지내고 있다. A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