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막 잘 지내다가 좀 뭔 일이 생겨. 그래서 내가 뭔 일이냐고 물어보면 너는 막 아니 S가...이러고 걔는 아니 H가...이러고 있어.

-걔가 내 얘길 했어?

-어 했어.

-나는 신경도 안 쓰는 줄 알았어.

-근데 너도 알아야 돼. 걔도 너한테 많이 맞춰줬어.



-근데 내가 그때 B가 진짜 꼴보기 싫었던 거는. 너랑 걔 사이를 다시 친구로서 잘 조율해주려는 그런 게 아니라 네 빈자리를 자기가 차지하려고 드니까 너무 싫었어.

-와. 헐. 진짜. 난 하나도 몰랐어.

-우리도 그 땐 몰랐어! 우리도 어렸으니까. 근데 지금 성인 돼서 생각해보니까 그런 거야.

-아 근데 그러네. 진짜 그러네.


-걔가 너랑 연을 끊으면서 나를 포함한 모든 애들과의 관계를 놨어.

-나는 그게 너무 마음에 걸려. 내가 걔를 그렇게 고립되게 만든 거 같아서.

-아니 근데 진짜 이건 네가 죄책감 느낄 건 아니야. 걔가 다 놓은 거야.


-그 때 왠지는 모르겠는데 J가 개빡쳐 있었고

-아 생각나. 미친. 웃겨 죽을 거 같아.

-지금이니까 웃으면서 말하지. 그 때 너는 누가 봐도 힘들어 보였잖아.



-근데 있잖아. 그 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걔를 정말 많이 좋아한 거 같아. 내 모든 걸 걔한테 맞춰주고 다 퍼주고 싶었던 만큼. 친구 이상으로.

-그런 거 같더라.

-나는 근데 이걸 시간이 지나고서 알았잖아. 근데 생각이 드는 게. 걔는 장본인이었잖아. 근데 내가 그런 마음인 걸 몰랐을까?

-아니. 걔도 같은 마음이었어. 그러니까 그렇게 된 거야.

-그랬으니까 관계가 이렇게까지 파탄이 났겠지?



-아 근데 진짜. 고백할 걸 그랬어. 내가 진짜 이 오빠랑 뭐 연애를 하고싶고 그런 걸 떠나서 그냥 고백했으면 후련했을 거 같아.

-어 그거 리얼이야 진짜. 괜히 숨기고 있어봤자 아무것도 안 돼. 하고 후회하는 게 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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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가벼운 불안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걸 자각한 것은 사실 이제 일년이 조금 넘어간다. 작년, 처음 정신과를 찾을 결심을 했고 거기서 우울증 및 불안장애 진단을 받아 치료를 진행하였다. 지금은 치료를 종결한지 거의 7개월이 지나가지만, 나는 다음 주 불면증 치료를 위해 다시 병원을 찾을 예정이다.

 각설하고. 나는 작년 약 한 달 정도 내 정신 상태에 대해 생각을 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사실 요즘도 마찬가지다. 병원 진료를 예약한 후로 최대한 휴식 시간을 많이 가지는 중인데, 이럴 땐 역시 생각 밖에 할 게 없다.

 작년 우울증 진단을 받은 후 가족들은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고 배려해주었다. 친구들 역시도 내 이야기를 들은 후 나를 챙겨주었고 내가 힘들어 할 때마다 도움을 주곤 했다. 그렇게해서 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많이 생긴 후 내 삶은 참 단순했다. 밤 열 시가 되면 잠들고 새벽 여섯 시면 자연스레 깨어나서 20분 가량을 걷고, 하루 일과를 마친 후엔 집에 와서 소파에 쓰러져 창 밖으로 보이는 노을을 보는 것. 그러다가 금방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시 잠드는 그런 일상. 해야 할 일도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사고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 때 과잉사고 상태였다. 생각이 멈추지 않아 잠이 오지 않았고, 자다가도 퍼뜩퍼뜩 깨곤 했다. 일상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어떤 일에도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 때 나는 최대한 글을 많이 썼다. 친구에게 편지를 정말 많이 썼다. 그게 내가 생각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더이상 글을 쓰지 못 할 만큼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나는 결국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 가서 어떻게 왔냐는 질문에 내가 한 말은 '생각이 너무 많아요'였다. 그런 조금은 유치하게도 들리는 말에서부터 상담은 시작됐다. 나는 상담을 하는 내내 울었다. 내 스스로가 그렇게나 억눌려 있었는지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렇게 해서 매주 미술 치료와 상담을 진행하고 항우울제를 매일 복용하며 내 삶은 단순해졌다. 내 상태를 알게 된 사람들은 내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다. 약을 먹은 덕분에 사고는 조금 줄어들었고 밤에 자기도 더 쉬워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머릿속이 평온해진 건 아니었다. 멍해진 상태로도 나는 계속 생각했다. 대신 나에게 생겼던 일들에 대해 생각하는게 아니라 내 현재 상태에 대해 생각했었다. 만성 우울증 진단을 받은 나에 대해.

 그 때가 너무 힘들었기에 정신과를 찾을 생각까지 했던 거지만, 사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내가 우울증이 아닐까 싶었다. 사춘기에 한 철없는 생각일거라 여겼었지만, 의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선생님께선 그 때부터, 아니면 그 전부터 우울증이었을 거란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나는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우울하다는 걸 자각하기엔 너무 어렸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너무도 우울한 어린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가 만성 우울증과 불안 장애였던 거 같다. 초등학교 때 매주 강당에 전교생이 한 번씩 모이는 날이 있었다. 나는 그게 너무 힘들었다. 운동장에서 모일 때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는데, 강당에만 들어가면 그 많은 아이들의 검은 머리통을 보는 게 숨이 턱턱 막혔다. 줄을 서서도 숨 쉬기가 너무 힘들어서 나는 그 시간이면 매번 담임 선생님께 숨이 안 쉬어진다 말하고 강당 밖에 우두커니 서 있곤 했다. 나는 그 때 너무 궁금했다. 왜 나만 힘들까. 다른 애들은 저기에 있는 게 안 힘들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나는 사람이 많은 곳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학원을 갈 때도 버스를 이용하기보단 발이 퉁퉁 붓는 것을 참으면서 30분씩 눈을 맞으며 걷곤 했고, 전교생이 강당에서 듣는 특강 같은 게 있으면 선생님께 혼나는 한이 있더라도 화장실이나 교실에 몰래 숨어 있었다. 한 학급 당 인원이 너무 많았던 중학교 3학년 땐 교실에 있는 것도 괴로워서 늘 점심시간에 등교하곤 했다.

 대학생인 지금, 나는 매일 4시간 씩 대중 교통을 이용하며 학교를 다닌다. 작년 치료를 통해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옛날만큼 어렵지 않은 지금도 나는 종종 괴롭다. 출근길 지하철이나 버스는 차마 발을 들일 수도 없어서 차라리 첫차를 타곤 하고, 어쩔 수 없이 출근 시간 버스를 한 번 탄 날은 결국 공황발작이 와 울면서 버스에서 뛰쳐나와야 했다. 사람이 꽉 찬 엘리베이터에 있던 날에도 결국 숨이 쉬어지지 않아 내리자마자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집에서 배가 너무 아팠던 날 내 몸이 두 개로 분리되는 듯한 기분에 나는 그 자리에서 걸치고 있던 옷을 다 벗어 던지기도 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나는 모르겠다. 내 현실엔 지금 불안할 요소가 그다지 없는데도 나는 여전히 공황 발작을 일으킬까봐 겁먹은 채로 지낸다. 이러한 약간의 불안장애를 지닌 채로 나는 일상을 가만히 살아가고 있다.

 왜 나에겐 남들보다 적은 공기가 허용될까. 왜 다른 사람들은 멀쩡히 서 있는데도 난 숨이 쉬어지지 않고 앞이 안 보여 쓰러질까. 어딘지도 모르는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엉엉 울면서 한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몸엔 감각이 없었으며 피부는 바늘에 찔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적은 공기로도 결국 나는 꾸역꾸역 잘 살아가고 있다. 죽어버릴 것만 같던 와중에도 나는 결국 택시를 타고 만원을 내며 학교에 갔고, 엘리베이터 밖에서 쓰러졌던 날도 결국 벤치까지 걸어가 거기서 잠들었다.

 앞으로도 나는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다음 주부터는 다시 약을 복용할 예정이지만, 이 증세가 언제쯤 호전될 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모자란 공기로 계속 숨쉬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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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난 집 안에서도 부모님께 1순위였던 적이 없잖아. 장녀인데도. 그런 점 때문에 누군가가 나를 1순위로 여기고 필요로 해주면 그 사람에게 마음이 가는 거 같아. 나를 찾아주면 그걸로도 너무 좋아서 그 사람에게 다 해주고 싶은 거 같아.


-너랑 나는 느끼는 가정의 무게가 다르겠지.

-그렇지.


-이틀 전에는. 너무 힘드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네가 전에 했던 말 있잖아. 가까이 살면 달려가서 만나고 싶다고. 진짜 뭔지 알겠더라. 집이 좀이라도 가까웠으면 그냥 걸어가든 버스를 타든 해서 가서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더라.


-보고싶다.

-만날 수 있긴 해?

-2월에 보러 가야지. 내가 보고 싶으니까.


-나를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거 같아. 내 성격을.

-좀 그렇긴 해. 나도 너랑 그냥 적당히 친했을 때, 아. 너도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네. 하여튼 그 때. 되게 편하다고 생각했어.

-음. 그냥 왜 있잖아. 진짜 가끔 연락하거든. 일년에 한 번 연락오고 그러는데 그런 식으로 연락오면 만나고 해도 되게 편한 애들. 그런 애들이 되게 많아. 내가 편하대. 남이 편하게 좋아해주는 거니까 좋은 거겠지?

-좋은 거지. 왜, 그. 인간관계를 시소에 비유하잖아. 그럼 너는 아래에 있는 거야. 언제든 네가 그냥 내릴 수 있는 거지.


-너 처음 봤을 때. 그 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J가 저렇게 편하게 대하는 사람이면 믿어도 되겠다고.

-편하게 대하는?

-어. J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편하게' 대하는 사람. 저런 애면 믿어도 되겠구나 싶었어. 그래서 얘기하다 보니까 성격도 좋고. 똑똑하고 야무지고. 그리고 얘기하면 할 수록 둘째랑 닮은 거 같더라고. 그러다보니 더 마음이 가고 챙겨주고 싶었고.

-아하하.

-진짜.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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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엔 정말 지루하다고 느꼈는데 다시 보니 왜이리 웃음이 나올까.

저 특수한 상황에서 두 사람은 서로 뿐이고 서로에게 궁금한 것 투성이다. 나도 저렇게 내 진솔한 이야기를 궁금해 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떨까.

연출 덕에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이었고 한 방향만을 바라봤지만, 나에겐 너무도 판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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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그래, 있잖아. 난 정말이지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어. 그래. 부정하진 않을게. 난 누군가에게 짐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거든. 하지만 난 정말로 기댈 사람이 필요했어. 그게 정말 위험한 생각인 거 알아. 근데 실은 그거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거지. 내가 누군가를 정말로 올바르게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냐는 말이야. 난 늘 내 감정에 자신이 없었어. 내가 바라는게 상호적인 거라는게 사실 참 무서웠지. 감히 내 주제에 바라면 안 되는 걸 바란다는 느낌을 도무지 버릴 수가 있어야지. 근데 한편으론 미친듯이 비참한 거야. 나는 사랑받을 수 없고 그 누구에게도 1순위가 되지 못한다는게 말이야. 알아. 웃긴 일인거. 하지만 난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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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강의에선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종교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우선 나는 천주교 신자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독실한 신자는 아니다. 어릴 적,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부모님을 따라 성당을 다녔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성당에 처음 가던 날 엄마가 나에게 '하느님 보러 가자'라고 하신 것이다. 나는 정말로 신을 볼 수 있는 줄 알고 신이 나서 따라갔다. 성당에 가면 문 앞에서 하느님(내 머릿속에선 예수님의 이미지였다)이 한 명 한 명을 맞아주는 줄 알았다. 하지만 문 앞에 아무도 없어서 나는 실망했고, 미사를 들으면서는 신부님이 미사를 드리는 모습에 오늘은 하느님이 안 오셨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 뒤에 있는 청소년 신도들을 보고 괜히 하얀 옷에 천사라고 착각해서 하느님이 아프셔서 천사들이 대신 왔구나 라고 생각했고, 미사가 끝나면 천장이 열리며 천사들이 날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이런 경험이 나의 첫 종교 활동이었기에, 나는 매주 성당을 나가면서도 '신은 없다'라고 생각하곤 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배신 당했다. 늘 나는 하느님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가 잘못 된 일을 할 때면 하느님이 하늘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가끔은 겁을 먹기도 했고 다리에 쥐가 나거나 몸이 간질거리면 하느님이 나를 쓰다듬으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당을 다니며 나는 신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나는 결국 신앙심 없이 성당을 다니게 되었다. 매주 성당을 나가고 교리 수업을 들었으며 가끔 마음이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빌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같이 성당을 다니던 친구들 만큼의 신앙심이 없었다. 그 만큼의 열정도 없었고 믿음도 없었다. 무신론자도 아니고 천주교 신자였으며 세례까지 받아 '글라라'로 불리며 살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지금에 이르러서. 나는 성당을 다니지 않는다. 더이상 나를 글라라라고 불러 주는 사람도 없고 힘든 일이 있어도 신을 찾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누군가가 종교를 물으면 천주교라 하고, 마음이 심란하거나 정말로 바라는 일이 생기면 성당을 찾곤 한다. 나에게 있어 종교란 무슨 의미일까. 가끔 생각하곤 했지만, 오늘 강의를 들으면서는 더욱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힘든 일이 있으면 결국 종교를 찾게 된다. 인간의 힘, 나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일이 생길 때 나는 무력해지지만 굴하지 않고 나의 의지를 넘어선, 어떠한 초월한 존재의 도움을 찾기 시작한다. 그게 나에게 있어서는 신인 것이다. 비록 나는 신에게 기도를 올리지 않는다. 식전 기도를 하지도 않고 아침에 엄마처럼 기도를 드리지도 않는다. 마리아상을 보았을 때 인사를 하지도 않고 헌금을 한 번도 천 원 이상 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신을 믿는 것이다. 정말로 신이 있다면, 그리고 모두의 말대로 그 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그는 바라는 것 없이 아가페의 형태로 날 사랑해주며 베풀 것이다. 내가 필요로 할 때마다 그는 나에게 위안을 주고 평화를 줄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 신의 의미이다.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믿는다, 라는 것은 나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갖는 것이다. 망설임이나 주저함 없이 내가 믿는 사실을 굳게 의지하며,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되새기는 것. 이 생각 자체가 나에게 있어선 종교 활동이다. 나는 나의 종교를 믿는다. 나를 사랑하는 신을 믿는다.




*

강의 듣고 제출한 감상문. 아무 말이나 막 쓰긴 했지만 전반적인 의견은 결국 내가 그간 해온 생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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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빅토리아의 여름은 눈부셔요. 한국의 여름은 정말 지긋지긋했는데, 이 곳에선 처음으로 여름이 조금은 좋아졌어요. 좀처럼 타지에 적응이 힘든 내가 이 시골을 좋아하는 이유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에요.

 혹시 알았나요. 내게 정신병이 있다는 걸.

 당신에겐 한 번도 말한 적도 내색한 적도 없었지만 나는 우울증 환자였어요. 어쩌면 지금도요. 아마 평생요. 맥주 한 캔을 마시지 않고서는 좀처럼 기분이 들뜨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런 나조차도 들뜨는 날들이 있었죠. 가을 날들. 날씨가 시원해지고 하늘이 새파래지면, 구름 한 점 없는 그 하늘을 보며 나는 기분이 좋아지곤 했어요. 알고 있나요?

 그래서 나는 여기가 좋아요. 그렇게도 오기 싫어했던 곳인데, 한국이 너무 그립지만 돌아가더라도 이 곳의 날씨만은 오래오래 그리울 거 같아요.

 어학원을 다니고 있어요. 한국에선 다들 내가 어학원에 가면 남자를 만나게 될 거라고 했는데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남자든 여자든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좋은 사람은 많았고 호감이 가는 사람도 내게 잘해준 사람들도 많았죠. 하지만 그들에게 연애감정을 느끼지는 못했어요. 생각해보면 그래요.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데 굉장히 까다로운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당신에게 그렇게 쉽게 빠진 날이 나는 너무 이상하게 느껴져요. 당신에게 품었던 오기가 어느 순간 애정으로 바뀌어버린 게, 너무 이상해요.

 머리가 많이 길어서 요즘은 머리를 땋기도 해요. 한국에 있을 땐 상상조차 못한 일들을 여기서 많이 하고 있어요. 외국인들 틈에 있으면 그래요. 내가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말하는 이 사람들이 엑스트라로 느껴지고, 나만 이 곳에서 생각을 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밝은 갈색으로 염색을 하고 머리를 땋고, 선글라스를 끼기도 하고 엄마가 주는 밀짚모자를 쓰기도 해요.

 예뻐졌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그리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니 사실은 종종, 아니 사실은 아주 가끔, 나는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도 날 보고 그렇게 말해줬을까요.

 한국 친구들과 연락을 많이 하면서도 당신에겐 좀처럼 먼저 연락을 하지 못했어요. 생각해보면 한국에 있을 때도 그랬죠. 나는 늘 당신의 연락을 받는 쪽이었어요. 당신과의 전화 통화는 발화의 비율이 8대 2쯤 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통화가 좋았어요. 술에 취해 들뜬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좋았어요. 내가 누군가에게 큰 비중은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그늘 같은 존재가 될 수는 있구나.

 그늘이란 말이, 사실 좀 슬프죠. 그저 쉬어가는 곳. 해가 움직이면 위치가 바뀌어버리는 곳. 그래서 당신도 그렇게 가끔만 내게 왔죠. 나는 그 가끔조차 너무 좋았어요. 때로는 당신이 나를 찾는다는 게, 내가 당신에게 필요한 존재라는게, 당신이 나에게서 위안을 얻는다는게 좋았어요.

 난 결코 누군가에게 1순위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에요. 가끔 욕심이 비집고 나오기도 해요. 왜 나를 내가 원하는 만큼 좋아해주지 않나요.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아요. 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늘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근데 작년엔 그게 좀 많이 슬펐던 거 같아요.

 내 스물은 아팠어요.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나는 반년을 슬픈 상태로 살았어요. 내 꿈에서조차 다정하질 않더라고요.

 빅토리아의 해는 아프지 않아요.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따뜻함을 느끼며 지내고 있어요. 밝은 갈색으로 염색을 하고 머리를 땋고, 선글라스를 끼기도 하고 엄마가 주는 밀짚모자를 쓰기도 하면서.

 그렇게도 못하던 요리를 하고 매일 같이 산책을 하기도 하고. 늘 가는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가끔 고개를 들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며 빅토리아의 태양에 겨워하면서. 나는 그렇게, 잘 지내고 있어요. 햇빛 속에서 병이 나아가는 걸 느끼며 너무도 잘 지내고 있어요.

 잘 지내나요. 당신의 그늘은 이제 해가 뺏어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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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때문에 오는 공황을 무시하기로 했어요.

 당신 때문에 숨이 막히거나 마구 서글퍼지는 새벽들에 더이상 집중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내게 그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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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은 새파랗고 햇볕은 따가웠다. 불어오는 바람은 차가우나 이파리는 푸른, 초가을의 한낮이었다.

 혜원은 이어폰도 꽂지 않은 채 종각 거리를 걷고 있었다. 걷는 것만이 우울과 잡념, 불안을 어느 정도 지워준다는 것을 혜원은 기나긴 불안장애 끝에야 깨달았다. 하지만 오늘은, 심장이 빨리 뛰는지 느리게 뛰는 지도 모를 만큼 어지러운 날이었다. 아마 빠른 것 같았다. 아까 먹은 아메리카노가 문제였나. 카페인은 당분간 멀리 해야겠다 생각하며 혜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너무 힘을 주고 감았던 탓인지 잠시 시야가 어두워졌다.

 한낮. 하지만 더울 시간은 조금 지난 시간. 그 덕인지 거리에 나와있는 많은 이들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날이 선선해진 뒤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혜원은 한결 편했다. 힘들 일 없이 편해 보이는 표정들, 여유롭고 안정된 얼굴들. 도심 한가운데서 마주치는 그 얼굴들이 보기 힘들지 않았다. 자신과 타인을 분리하면서도, 그들과 함께 걷고 있다는 점에서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물론 모두가 불안을 안고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을 모두 배제하고 보는 풍경이 혜원은 좋았다.

 이 날씨, 이 풍경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분이겠지. 심박이 조금씩 느려지는 것을 느끼며 혜원은 걸음걸이를 늦추었다.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불안이 떨어져 나가길 바랐다. 집에 가서 씻고 편안히 누워 낮잠을 자고 싶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혜원은 지금 도심 한가운데를 산책하고 있다. 날씨마저도 걷기에 딱 좋았다. 걸으면 이 불안이 조금은 사라지길 빌며 혜원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내쉬었다.

 오랜 우울증이 끝나고 혜원은 여유를 찾았다(되찾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불안장애는 이런 날이면 혜원을 더 불안하게 했다. 숨이 안 쉬어지면 어떡하지. 계속 심장이 빨리 뛰면 어떡하지. 주저앉게 되면 어떡하지.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날씨 덕에 기분은 좋았는데, 마음은 조금도 편하지 않았다.

 신경을 끄는 건 어떻게 하는 거더라. 원래 뭘 버리는 걸 잘 못했다. 그게 인간관계에도 적용이 되는 줄은 고등학교 3학년 때에야 깨달았다. 1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신경을 끊고, 연락을 받지 않으면 된다. 너무도 간단했는데 혜원은 그걸 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럴 마음이 없는지도 모른다. 싫어하는 사람의 연락조차도 받아주는게 그간 혜원의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하물며 좋아하는 사람은. 입가에 잠시 자조적인 미소가 피어올랐다.

 처음 서울에 와서 혜원은 사람들의 무관심함을 겁냈다. 하지만 반년이 지난 지금은 자신이 길거리를 울면서 걸을 지라도 아무도 말을 걸지 않으리란게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그렇다고 해서 울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여하간 혜원의 입엔 꽤 오래 쓴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인간관계에 자신이 서툰 것일까. 사실 자신의 성격이 평범한 관계를 맺기에는 굉장히 무난하단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이상이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혜원은 자신의 우울함을 드러내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울감과 불신을 드러내고, 어딘가에선 밑바닥을 드러내고 투정을 부려야만 살 수 있었다. 자신도 그걸 단점이라 생각했다. 누군가는 결국 내 밑바닥을 보고 떠날 것이다, 라고.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혜원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에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요즘은 정말 힘들었다. 자꾸만 밑바닥이 보였고, 그걸 드러내기가 힘들었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이렇게까지 괴로울 일인가.

 단어 그대로 괴로웠다. 숨 쉬는 것조차 갑갑할 정도로. 혜원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바깥을 향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혜원의 마음은 정반대였다. 방향이 안으로 향했다. 그것도 날카로운 가시로. 스스로가 괴로워지는 감정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감정 끝에 연애를 시작하는 걸까? 그러다가 문득 헛웃음이 터졌다. 아, 나는 짝사랑이구나. 'ㅋㅋㅋ'가 머리 옆에 떠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짝사랑일까? 아니 애초에 이게 사랑이라고 거창하게 칭할 감정인가? 혜원은 자신의 감정에 자신이 없었다. 사실은 그런 의미를 부여하기가 겁나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 맞겠지. 소설이나 영화에나 나올 법한 말이네. 여전히 햇볕은 따가웠다. 아직 한낮이다. 밝음이 어지럽다.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기가 왜 겁이 날까.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그 사람이 겁이 났다. 좋은 부분보다 싫은 부분이 더 많은 사람이다. 미웠다. 단순히 자신이 좋아한단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기대를 걸고 그것 때문에 미워진다니. 우스운 얘기다. 터덜터덜, 걸음걸이가 느려졌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차가웠다. 그나마 바람이 시원해서 정신이 깨어있는 기분이었다. 당신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해버리면, 그 때부터 당신에게 걸게 될 무한한 기대가 겁이 나요. 절대 나에겐 그 기대만큼의 무언가가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나무 아래 그늘을 벗어나며 햇빛이 눈을 찔렀다. 혜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따가운 볕에 눈부신 햇빛에. 이 좋은 날씨에. 심박수가 또다시 조금 낮아지는게 느껴졌다. 기분 탓일지라도.

 지나가는 연인들이 보인다.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고 그걸 표현할 수 있나요? 하지만 금방 시선을 거두었다. 다른 부류의 사람이다. 또한 혜원 자신은 결코 그 사람과 잘 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기대를 품은 적이 없다면 거짓말일 거다. 왜냐면, 사실 여지를 참 많이도 줬거든. 하지만 결코 먼저 다가갈 수 없었다. 겁나니까. 혼자만의 마음이었단 걸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마음을 자각할 즈음부터 예상한 결과였다. 결국 어떤 무엇이었던 적도 없는 채로 각자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결말.

 걷기의 장점이 이런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사고하지만, 결코 오래 머물지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쉼없이 생각들이 흐른다. 웃음이기도 울음이기도, 비명이기도 한 소리들이 3초마다 뒤바뀌며 들려온다. 그러고보니 한 때는 뇌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지. 차라리 뇌기능이 정지했으면 싶을 정도로 머리가 핑핑 돌았다. 그 때도 좀 많이 걸었으면 조금은 달랐을까. 의미없는 소리들이 스쳐가고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다시 그 자리를 메운다.

 나를 좋아해요? 나랑 얘기하면 즐거워요? 내가 늘 있다는게, 마음이 놓여요?

 그런 게 아니라면 나한테 왜 그래요?

 묻고 싶지만 결코 묻지 못할 질문들이 너무도 많다. 혜원은 그런 생각들을 곱씹다가 이내 발걸음과 함께 모두 흘려보냈다. 미련이 없다. 가망이 없기에.

 그러고보니 언제부터 사람들을 겁내지 않고 길을 걸을 수 있게 됐을까? 서울에 왔을 때부턴가. 그 낯설던 도시가 익숙해지는 것도 참 오묘한 일이지. 이 풍경들도 너무너무 싫었는데 어느새 이 여유로움에 덩달아 빠져서는 걷고 있는 것도 참 웃긴 일이지.

 나 많이 여유로워졌구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금 이 미칠 듯한 불안감과 무너지는 정신과는 별개로 오랜 시간 발 담그고 있던 정신과 시간의 늪에서 빠져나왔구나. 하지만 그럼에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음에 혜원은 자조했다. 남들이 보기엔 나 역시도 여유롭게 걱정도 급한 일도 없이 거리를 걷는 사람이겠지. 내가 멋대로 사람들을 그렇게 보고 있듯이.

 이렇게 한낮에 낯선 장소를 걷고 있자면 혜원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서 달아난 기분이 들었다. 근 몇주 간 내내 가슴이 죄여오는 기분이었는데, 잠시 이렇게 걸어서 차분해질 일일까.

 도망가고 싶다. 모든 것에 능숙한 당신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것에 서툰 자신으로부터.

 걷는 것조차도 서툴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길거리에서 잠시 멈춰선 다음 심호흡을 해야만 하던 순간들. 종종 그 사람이 떠올라 울고만 싶어지는 순간들. 걸음이 느려진다. 모든 것에 능숙한 이에게 빠지는 것이 너무도 어리숙하게 느껴져서 그 사실이 괴로웠다. 자신을 조심스러워하는 걸 느낄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차마 서로를 함부로 하지 못할 만큼의 차이. 아닌 척 감싸고 감싸면서, 자꾸만 숨기는 사실들.

 어차피 너도 곧 가잖아. 어떤 의미에서 한 말일까. 혜원은 잠시 생각했다. 혜원이 한국을 떠날 1년. 짧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멀어지고 멀어지기엔 충분하죠. 혜원은 그 말을 듣고부터 너무도 겁났다. 만약 내가 떠나지 않으면 어떠한 진전이 있나요? 하지만 그 진전 끝에 내가 행복한가요? 당신도 행복한가요? 떠나기 전에 끝나 버릴 것만 같단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하지만, 시작이 없을 거란 생각은 더더욱 많이 들었다.

 당신은 나만큼이나 솔직하지 못해서. 혜원은 눈을 깜박였다. 그늘을 벗어난 얼굴에 그대로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좋아한단 걸 알면서도. 두 발이 멈췄다. 내가 이렇게나 불안하고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사람인 걸 알면서도.

 길에 멈춰선 혜원 곁으로 사람들은 멈추지 않고 지나간다. 그들은 여전히 여유롭다. 초가을의 한낮을 즐기며 웃음을 터뜨리며 서로서로를 지나친다. 빠르기도, 느리기도 한 걸음들로.

 우린 서로가 서로를 기다리고 있다.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혜원은 고개를 들었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새하얗게 조각나는 해, 그리고 빛나는 마천루들. 서로가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해서, 우리에겐 가망이 없다. 차마 확신하기 겁났지만, 인정하지 않는 것조차도 괴로운 생각들. 우린 솔직하지 못해요. 그리고 나는 겁이 많고 당신은 주저해요. 그래서 우리에겐, 시작이 없어요.

 나는 곧 멀리 떠나요. 그 전까지 당신도 나도 시작을 하지도, 끝을 맺지도 못할 거예요.

 좋아하는 만큼이나 서로를 겁내서.

 눈물이 툭 터져버렸다. 차갑게 식은 얼굴로 아주 조금의 눈물이 흐른다. 여전히 해는 눈부시고 볕은 따갑다. 혜원은 여전히 불안하고 멈춰버린 걸음은 생각들을 흘려보내지 못한다.

 너무도 한낮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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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생각을 했어요.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당신을 생각해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자면 당신은 내 머리 위에서 떠다녀요.

 좋아하는 부분보다 싫어하는 부분이 더 많은데. 목소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말하는 게 좋은 것도 아닌데. 나한테 하는 말 하나하나 다 밉고 싫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을 좋아하는 내 모습은 너무 추해서 가끔 나는 말을 잃어요. 그럼 당신은 말이 없는 나를 나무라요.

 내 존재를 지우고 그저 사물로서 당신 곁에 존재할 순 없을까. 당신과의 어떠한 소통보다도 당신 자체에 비중을 둔 사랑을 할 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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