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새파랗고 햇볕은 따가웠다. 불어오는 바람은 차가우나 이파리는 푸른, 초가을의 한낮이었다.
혜원은 이어폰도 꽂지 않은 채 종각 거리를 걷고 있었다. 걷는 것만이 우울과 잡념, 불안을 어느 정도 지워준다는 것을 혜원은 기나긴 불안장애 끝에야 깨달았다. 하지만 오늘은, 심장이 빨리 뛰는지 느리게 뛰는 지도 모를 만큼 어지러운 날이었다. 아마 빠른 것 같았다. 아까 먹은 아메리카노가 문제였나. 카페인은 당분간 멀리 해야겠다 생각하며 혜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너무 힘을 주고 감았던 탓인지 잠시 시야가 어두워졌다.
한낮. 하지만 더울 시간은 조금 지난 시간. 그 덕인지 거리에 나와있는 많은 이들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날이 선선해진 뒤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혜원은 한결 편했다. 힘들 일 없이 편해 보이는 표정들, 여유롭고 안정된 얼굴들. 도심 한가운데서 마주치는 그 얼굴들이 보기 힘들지 않았다. 자신과 타인을 분리하면서도, 그들과 함께 걷고 있다는 점에서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물론 모두가 불안을 안고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을 모두 배제하고 보는 풍경이 혜원은 좋았다.
이 날씨, 이 풍경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분이겠지. 심박이 조금씩 느려지는 것을 느끼며 혜원은 걸음걸이를 늦추었다.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불안이 떨어져 나가길 바랐다. 집에 가서 씻고 편안히 누워 낮잠을 자고 싶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혜원은 지금 도심 한가운데를 산책하고 있다. 날씨마저도 걷기에 딱 좋았다. 걸으면 이 불안이 조금은 사라지길 빌며 혜원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내쉬었다.
오랜 우울증이 끝나고 혜원은 여유를 찾았다(되찾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불안장애는 이런 날이면 혜원을 더 불안하게 했다. 숨이 안 쉬어지면 어떡하지. 계속 심장이 빨리 뛰면 어떡하지. 주저앉게 되면 어떡하지.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날씨 덕에 기분은 좋았는데, 마음은 조금도 편하지 않았다.
신경을 끄는 건 어떻게 하는 거더라. 원래 뭘 버리는 걸 잘 못했다. 그게 인간관계에도 적용이 되는 줄은 고등학교 3학년 때에야 깨달았다. 1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신경을 끊고, 연락을 받지 않으면 된다. 너무도 간단했는데 혜원은 그걸 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럴 마음이 없는지도 모른다. 싫어하는 사람의 연락조차도 받아주는게 그간 혜원의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하물며 좋아하는 사람은. 입가에 잠시 자조적인 미소가 피어올랐다.
처음 서울에 와서 혜원은 사람들의 무관심함을 겁냈다. 하지만 반년이 지난 지금은 자신이 길거리를 울면서 걸을 지라도 아무도 말을 걸지 않으리란게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그렇다고 해서 울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여하간 혜원의 입엔 꽤 오래 쓴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인간관계에 자신이 서툰 것일까. 사실 자신의 성격이 평범한 관계를 맺기에는 굉장히 무난하단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이상이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혜원은 자신의 우울함을 드러내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울감과 불신을 드러내고, 어딘가에선 밑바닥을 드러내고 투정을 부려야만 살 수 있었다. 자신도 그걸 단점이라 생각했다. 누군가는 결국 내 밑바닥을 보고 떠날 것이다, 라고.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혜원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에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요즘은 정말 힘들었다. 자꾸만 밑바닥이 보였고, 그걸 드러내기가 힘들었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이렇게까지 괴로울 일인가.
단어 그대로 괴로웠다. 숨 쉬는 것조차 갑갑할 정도로. 혜원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바깥을 향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혜원의 마음은 정반대였다. 방향이 안으로 향했다. 그것도 날카로운 가시로. 스스로가 괴로워지는 감정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감정 끝에 연애를 시작하는 걸까? 그러다가 문득 헛웃음이 터졌다. 아, 나는 짝사랑이구나. 'ㅋㅋㅋ'가 머리 옆에 떠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짝사랑일까? 아니 애초에 이게 사랑이라고 거창하게 칭할 감정인가? 혜원은 자신의 감정에 자신이 없었다. 사실은 그런 의미를 부여하기가 겁나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 맞겠지. 소설이나 영화에나 나올 법한 말이네. 여전히 햇볕은 따가웠다. 아직 한낮이다. 밝음이 어지럽다.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기가 왜 겁이 날까.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그 사람이 겁이 났다. 좋은 부분보다 싫은 부분이 더 많은 사람이다. 미웠다. 단순히 자신이 좋아한단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기대를 걸고 그것 때문에 미워진다니. 우스운 얘기다. 터덜터덜, 걸음걸이가 느려졌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차가웠다. 그나마 바람이 시원해서 정신이 깨어있는 기분이었다. 당신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해버리면, 그 때부터 당신에게 걸게 될 무한한 기대가 겁이 나요. 절대 나에겐 그 기대만큼의 무언가가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나무 아래 그늘을 벗어나며 햇빛이 눈을 찔렀다. 혜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따가운 볕에 눈부신 햇빛에. 이 좋은 날씨에. 심박수가 또다시 조금 낮아지는게 느껴졌다. 기분 탓일지라도.
지나가는 연인들이 보인다.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고 그걸 표현할 수 있나요? 하지만 금방 시선을 거두었다. 다른 부류의 사람이다. 또한 혜원 자신은 결코 그 사람과 잘 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기대를 품은 적이 없다면 거짓말일 거다. 왜냐면, 사실 여지를 참 많이도 줬거든. 하지만 결코 먼저 다가갈 수 없었다. 겁나니까. 혼자만의 마음이었단 걸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마음을 자각할 즈음부터 예상한 결과였다. 결국 어떤 무엇이었던 적도 없는 채로 각자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결말.
걷기의 장점이 이런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사고하지만, 결코 오래 머물지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쉼없이 생각들이 흐른다. 웃음이기도 울음이기도, 비명이기도 한 소리들이 3초마다 뒤바뀌며 들려온다. 그러고보니 한 때는 뇌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지. 차라리 뇌기능이 정지했으면 싶을 정도로 머리가 핑핑 돌았다. 그 때도 좀 많이 걸었으면 조금은 달랐을까. 의미없는 소리들이 스쳐가고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다시 그 자리를 메운다.
나를 좋아해요? 나랑 얘기하면 즐거워요? 내가 늘 있다는게, 마음이 놓여요?
그런 게 아니라면 나한테 왜 그래요?
묻고 싶지만 결코 묻지 못할 질문들이 너무도 많다. 혜원은 그런 생각들을 곱씹다가 이내 발걸음과 함께 모두 흘려보냈다. 미련이 없다. 가망이 없기에.
그러고보니 언제부터 사람들을 겁내지 않고 길을 걸을 수 있게 됐을까? 서울에 왔을 때부턴가. 그 낯설던 도시가 익숙해지는 것도 참 오묘한 일이지. 이 풍경들도 너무너무 싫었는데 어느새 이 여유로움에 덩달아 빠져서는 걷고 있는 것도 참 웃긴 일이지.
나 많이 여유로워졌구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금 이 미칠 듯한 불안감과 무너지는 정신과는 별개로 오랜 시간 발 담그고 있던 정신과 시간의 늪에서 빠져나왔구나. 하지만 그럼에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음에 혜원은 자조했다. 남들이 보기엔 나 역시도 여유롭게 걱정도 급한 일도 없이 거리를 걷는 사람이겠지. 내가 멋대로 사람들을 그렇게 보고 있듯이.
이렇게 한낮에 낯선 장소를 걷고 있자면 혜원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서 달아난 기분이 들었다. 근 몇주 간 내내 가슴이 죄여오는 기분이었는데, 잠시 이렇게 걸어서 차분해질 일일까.
도망가고 싶다. 모든 것에 능숙한 당신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것에 서툰 자신으로부터.
걷는 것조차도 서툴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길거리에서 잠시 멈춰선 다음 심호흡을 해야만 하던 순간들. 종종 그 사람이 떠올라 울고만 싶어지는 순간들. 걸음이 느려진다. 모든 것에 능숙한 이에게 빠지는 것이 너무도 어리숙하게 느껴져서 그 사실이 괴로웠다. 자신을 조심스러워하는 걸 느낄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차마 서로를 함부로 하지 못할 만큼의 차이. 아닌 척 감싸고 감싸면서, 자꾸만 숨기는 사실들.
어차피 너도 곧 가잖아. 어떤 의미에서 한 말일까. 혜원은 잠시 생각했다. 혜원이 한국을 떠날 1년. 짧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멀어지고 멀어지기엔 충분하죠. 혜원은 그 말을 듣고부터 너무도 겁났다. 만약 내가 떠나지 않으면 어떠한 진전이 있나요? 하지만 그 진전 끝에 내가 행복한가요? 당신도 행복한가요? 떠나기 전에 끝나 버릴 것만 같단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하지만, 시작이 없을 거란 생각은 더더욱 많이 들었다.
당신은 나만큼이나 솔직하지 못해서. 혜원은 눈을 깜박였다. 그늘을 벗어난 얼굴에 그대로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좋아한단 걸 알면서도. 두 발이 멈췄다. 내가 이렇게나 불안하고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사람인 걸 알면서도.
길에 멈춰선 혜원 곁으로 사람들은 멈추지 않고 지나간다. 그들은 여전히 여유롭다. 초가을의 한낮을 즐기며 웃음을 터뜨리며 서로서로를 지나친다. 빠르기도, 느리기도 한 걸음들로.
우린 서로가 서로를 기다리고 있다.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혜원은 고개를 들었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새하얗게 조각나는 해, 그리고 빛나는 마천루들. 서로가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해서, 우리에겐 가망이 없다. 차마 확신하기 겁났지만, 인정하지 않는 것조차도 괴로운 생각들. 우린 솔직하지 못해요. 그리고 나는 겁이 많고 당신은 주저해요. 그래서 우리에겐, 시작이 없어요.
나는 곧 멀리 떠나요. 그 전까지 당신도 나도 시작을 하지도, 끝을 맺지도 못할 거예요.
좋아하는 만큼이나 서로를 겁내서.
눈물이 툭 터져버렸다. 차갑게 식은 얼굴로 아주 조금의 눈물이 흐른다. 여전히 해는 눈부시고 볕은 따갑다. 혜원은 여전히 불안하고 멈춰버린 걸음은 생각들을 흘려보내지 못한다.
너무도 한낮인데.